누군가는 나를 부럽다 한다. 산에서 만난 노인이 그렇고 슈퍼의 점원이 그렇고...
나는 반려견과 함께 산행을 하는 그 여자가 부러웠고 낯선 남자와도 허물없이 웃고 대화하는 젊은 여자가 부러웠다.
(머니파워=황진교) 침대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부스스한 머리엔 모자를 눌러쓰고 세수도 안 한 얼굴은 넥워머로 반쯤 가리고 커피와 생수가 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12월 들어 네 번째 아침 산행이다.
맑고 찬 아침 공기는 집안에서 묻어 나온 나른한 기운을 추풍낙엽처럼 떨군다. 연한 화장품 냄새를 날리며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을 스쳐지나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 오래된 주택가를 걸어 올라가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오르막을 올라가면 등산로 입구이다.
겨울 아침산은 고요하다. 고요하고 맑다. 고요하고 맑고 차다. 그래서 신선하다. 여름과 가을엔 안양천을 달렸는데 이제 다시 산을 오른다. 나는 어쩐지 온갖 생명이 움트는 봄산의 수선스러움이나 녹색의 푸르름으로 꽉 찬 여름산이나 만산홍엽의 가을산보다 텅 빈 듯 황량한 겨울산이 좋다.
낙엽에 덮인 흙길은 동태처럼 꾸덕꾸덕 얼어 있어 스틱이 튕겨져 나온다. 지난 첫눈 폭설에 부러지고 넘어진 나무에 가로막힌 등산로가 자주 나타난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낙엽과 잡목이 켜켜이 쌓인 비탈에는 폭설이 남겨놓은 잔설로 뒤덮여 때 묻은 양털처럼 희끗희끗하다. 한 때 폭설로 변해 온 산을 점령했던 기억을 뒤로한 채 잔설은 이제 온순하게 소멸만을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 녹색풍의 패딩과 두꺼운 바지에 귀까지 막은 겨울모자를 쓴 등산객이 보인다. 구부정하게 느릿느릿 올라가는 폼이 영락없는 노인이다. 나는 노인을 앞지를 것 같다.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펴더니 내 기척을 들었는지 뒤를 돌아본다.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배려하듯 등산로에서 비껴 선다. 나는 보일 듯 말 듯 목례를 하고 노인을 지나쳐 올라간다. 힐끗 본 노인의 얼굴엔 주름이 깊다.
젊어서 좋네...
노인의 나직한 말을 나는 듣는다. 쓴웃음이 난다. 노인의 말을 정정해 주고 싶다.
건강해 보여서 좋네...
아니면
젊어 보여서 좋네...라고.
관모봉(426m)엔 여전히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아무도 없다. 하늘이 맑아 먼 산의 등성이와 등성이 사이의 높고 낮은 건물들도 선명하게 보인다. 바람은 잔잔하지만 장갑을 벗으니 손이 시리다. 작은 새 몇 마리가 데크 주위를 맴돈다. 피해 날아가기는커녕 뭔가를 요구하듯이 고 작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가까이 앉아 있다. 사진을 찍으려 조심스럽게 움직이면 포르르 날아가 버린다. 먼 곳에 앉아 있는 새를 보니 그제야 망원경을 또 잊어버리고 갖고 오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집에 가면 배낭에 망원경부터 넣어 둬야겠군... 생각한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반대편 쪽에서 회색의 두터운 옷을 입은 강아지가 기척도 없이 조용히 올라온다. 내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강아지의 뒤를 따라 여자 등산객이 올라온다. 강아지가 여자를 올려다보고 여자가 몸을 굽혀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든다. 둘의 시선과 몸짓에 애정과 믿음이 넘친다.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강아지와 여자는 어쩐 일이지 바로 내려가버린다. 나는 아쉬움에 그들이 내려간 곳에서 시선을 쉽게 거두지 못한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기르지 않는다. 기르지 못한다. 한 생명을 책임지기에 내 삶은 너무 허술하고 빈약하고 나는 너무 이기적이다.
데크 바로 밑에서 젊은 여자의 높은 웃음소리가 을라온다. 고요하기에 더욱 높고 크게 들리는 웃음소리.
30대쯤 되었을까... 긴 생머리에 곱게 화장을 하고 군살 없는 몸매에 세련된 유명 브랜드의 아웃도어를 입고 있다. 뒤이어 젊은 남자가 따라 올라온다. 둘의 얼굴은 밝고 활기차고 조금은 들떠 보인다.
커피 드실래요?
아니요... 몇 년 전에 끊었어요... 잠이 안 와서...
사진 찍어 드릴까요?
아니요... 풍경사진은 찍어도 인물사진은 안 찍어요...
아마도 산행 중에 만난 모양이다. 어쩌면 위험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는 우연의 만남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외향성이 젊음이 문득 부러워진다. 그들의 만남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한참 대화를 주고받던 그들도 내려가고 커피도 다 마셨고 엉덩이는 시려온다. 잠시 겨울산의 정취에 빠져 있다가 배낭을 챙긴다.
산을 내려와 집 가까운 슈퍼에 들른다. 출입문 옆 감자와 봄동과 무와 섬초가 쌓여 있는 야채코너 속에서 상자 속 야채를 투명비닐봉지에 나눠 담고 있던 나이 든 여자 직원이 봄동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며
산에 갔다 오나 보네.. 부러워라...
혼잣말인 듯 나직이 말한다. 나를 보느라 작업하던 손동작이 느려진다. 어쩐지 부끄러워 나는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짓고는 급하게 봄동 하나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누군가는 나를 부럽다 한다. 산에서 만난 노인이 그렇고 슈퍼의 점원이 그렇고...
나는 반려견과 함께 산행을 하는 그 여자가 부러웠고 낯선 남자와도 허물없이 웃고 대화하는 젊은 여자가 부러웠다.
내려다보면 나를 부러워하는 누군가가 있고 올려다보면 내가 부러워하는 누군가가 있다.
가끔은 내려다보며 겸손해지고 가끔은 올려다보며 체념한 무언가를 다시 시도해 볼 용기를 내보는 것도 괜찮은 삶의 태도가 될까...
봄동을 배낭에 넣고 집으로 향하다가 문득 실소를 흘린다. 거지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좀 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라는 말이 생각 나서다. 나는 거지구나 흐흐흐...
실소가 지나가니 또다시 문득 쓸쓸해진다.
누군가에게 여유롭고 평온해 보이는 내 모습 안의 늘 불면의 밤을 파고드는 어지러운 상념과 가끔 목을 조이는 듯 엄습해 오는 불안은 아는 이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것은 아무도 볼 수 없고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오롯이 나만의 것임을 안다.
어쨌거나 오늘의 나는 누군가 부러워하는 존재...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봄동전을 만들어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하오의 햇살이 들어찬 거실의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책을 편다. 예상대로 금방 잠이 온다. 나는 잠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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