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날 병원의 접수/수납 창구 앞 대기실에서, 어쩐지 업무에 미숙해 보이고 불친절하기까지 한 어린 남직원을 보면서 공황장애를 겪는 드라마 속 인물을 떠올린 것은 드라마를 본 여운이 가시지 않은 시기에 병원에 가게 된 우연으로 인한 일종의 경미한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머니파워=머니파워) 오전 9시 반이 안 된 시간인데도 종합병원의 접수/수납 창구 대기실은 빈자리가 없었다. 붐비는 시간을 피하고 싶어 나름 부지런을 떤 행위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영하의 날씨 탓에 저마다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거나 들거나 의자 위에 포개어 놓고 있어서 분위기는 무겁고 어둡고 칙칙했다. 겨울 패딩 점퍼는 왜들 어둔 색을 많이 입는지...
대부분이 노령층이었고 반 정도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장소가 병원임을 감안하더라도 우리나라가 드디어 65세 이상의 인구가 20%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고 흘려들은 뉴스가 실감 났다. 접수/수납 창구 옆에는 무인수납기 키오스크 두 대가 있음에도 번호표를 뽑고 앉아서 기다리는 방문자들이 많은 것은 대부분 노령층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가족력이 확실한 고혈압 환자로 몇 년째 2 -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방문하여 간단한 진단 후 약처방을 받아오고 있다. 이사오기 전에는 집 가까운 개인병원에 다녔었는데 이사 온 후 집에서 가까운 이 종합병원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진료가 끝난 후 진료비를 계산했던 이전 방법과는 달리 '수납 후 진료 및 검사'가 진행되는 방법과 키오스크 수납에 익숙지가 않았다. 그날 나는 정확한 약처방을 위해서 채혈 채뇨검사와 심폐기능검사와 영상의학검사를 해야 했고 그 비용은 십만 원이 넘었다.
시간을 단축하고 싶어 키오스크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되지 않았고 도움을 주려는 자원봉사자도 몇 번 시도해 보다가 나를 접수/수납 창구로 데리고 가서 번호표를 뽑아 주었다.
창구에는 세 명의 직원이 일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은 여직원이고 한 명은 남직원이었다. 두 여직원 앞의 대기번호를 알려주는 기계는 딩동딩동 소리를 내며 빠르게 올라가는 반면 남직원 자리의 번호는 계속 멈춰 있었다. 한 남자 방문객이 계속 뭔가를 요구하고 있고 남직원은 컴퓨터를 쳐다보며 자판을 두드려가면서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방문객은 방문객대로 답답해하는 것 같고 남직원은 또 남직원대로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남자 방문객이 남직원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을 칠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남직원은 업무에 조금 미숙한 신입직원처럼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이마를 덮은 일자에 가까운 머리가 더욱 사회 초년생 같은 어리고 미숙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다가 편안한 자율복장인 두 여직원과는 달리 넥타이까지 맨 정장차림이 나의 그런 짐작을 굳혀 주었다. 뭔가 일처리가 매끄럽지 않은데도 옆의 여직원에게 도움을 청하기에는 그 여직원도 너무 바빴다.
마침 교대시간인지 남직원 옆에 노련해 보이는 여직원이 교대해서 앉고 있었다. 남직원은 업무가 잠깐 끊기는 이 교대시간을 기회로 교대한 여직원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의자를 틀고 몸을 낮추며 다가가 도움을 요청하는 듯 보였다. 그러자 남직원을 상대하던 방문객도 그 여직원 앞으로 옮겨 섰다. 방문객은 장애인등록에 필요한 서류를 요구하는 듯했고 여직원은 필요한 서류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해 주었다. 아마도 접수/수납 창구에서 해결해 줄 수 없는 서류인 듯 했다. 드디어 남직원 앞의 번호도 바뀌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린 나는 맨 끝에 있는 여직원에게 수납을 처리했다. 그리고 검사 후 두 시간을 기다려 검사 결과에 대한 진료를 끝낸 후 실비보험을 위한 '진료비 세부 산정 내역'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서 다시 접수/수납창구를 찾았다. 대기실은 여전히 앉을자리가 없었다. 대기자들 사이에서 복잡하고 긴 대기시간에 대해 요즘 의사파업 때문이라고 낮게 정부를 성토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 남직원 앞 번호기계에서 내가 뽑은 번호가 딩동거렸다.
남직원은 지쳐 보였다. 일자로 자른 이마 위 검은 머리와 마스크 사이의 두 눈이 사람과 일과 자신의 비관적 감정에 시달린 티가 역력했다. 나는 어쩐지 짠해져서 내가 필요한 서류를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남직원은 뭐라 뭐라 하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시선을 컴퓨터에서 떼지 않으며 되물었고 나는 창구에 들어갈 듯 머리를 들이밀며 네? 하고 되물었다. 다시 설명하는 남직원의 목소리는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오늘 예약하신 심폐기능검사는 검사를 안 하셨기 때문에 오늘 이전 내역만 뽑아드리면 되죠? " 남직원이 되물었고
"3월로 예약된 심폐기능검사 말씀하시는 거죠? 그건 당연히 검사를 안 했죠 수납만 했고요... 3월에 예약된 검사도 수납 먼저 하라던데요?" 내가 되물었고
"그러니까 오늘 이전 내역만 뽑아드린다고요... " 남직원이 말했고
"아니 오늘 이전 거는 없을걸요... 제가 이사 와서 이 병원에선 오늘 처음 진료받았으니까요... 오늘 검사한... 십 얼마 나온 거에 대한..."
뭔가 대화가 어긋나는데도 남직원은 자판을 두드렸고 그에 따라 출력기에서 서류들이 나오고 있었다.
남직원의 말투는 낮고 지치고 불만스럽고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또한 그런 몸짓으로 출력된 서류를 건네주었고 나는 서류를 받아 들고 확인하고 돌아섰다. 필요한 서류가 맞는데 대화가 어긋났던 것이다. 내가 못 알아 들었을 수도 있고 그 직원이 못 알아 들었을 수도 있지만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악의에 찬 불친절이 아니라 누르고 누르는데도 자신의 의지를 뚫고 올라오는 불친절임이 느껴져서였다.
그래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니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방문객들한테도 그렇게 하다가 혹시라도 컴플레인이 걸릴까 걱정까지 들었다. 아들 같아서인 이유도 있지만 며칠 전 본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한 인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는 정신병동에서 일하게 된 간호사 정다은(배우 박보영)이 정신병동 안에서 만나는 세상과 환우들의 스토리를 그린 2023년 넷플릭스 시리즈물로 불면증, 강박증, 양극성장애,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 등 일상 속에서 많이 겪는 '흔한 정신병'을 다루었다.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는 간호사 정다은과 그녀가 맡은 기막힌 사연을 가진 다양한 환자들이 나온다. 보이스피싱으로 전재산을 잃고 자살시도를 하다가 이송되어 온 후 망상증에 시달리는 환자, 직장상사의 가스라이팅으로 불안 장애가 생긴 환자, 공시를 준비하다가 잠깐 빠져든 게임세계를 현실로 착각해 입원한 망상증 환자 등 등.
이들은 병이 호전되어 퇴원하기도 하고 병이 좀처럼 호전되지 않아 정신병동을 옮겨가며 환자로만 생활하기도 하고 호전된 듯하여 퇴원하였다가 현실에 적응해 나가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특히 자살을 택한 공시생 망상증 환자로 인해 정다은 간호사는 자신이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동에 입원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는다. 그럼에도 정다은은 다시 간호사로 복직한다. 진심으로 환자들의 곁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그토록 상처받았음에도. 이후 정신병동에 입원했었다는 자신의 병력이 알려지면서 보호자들의 거센 항의에 시달리지만 그것조차도 꿋꿋하게 이겨낸다.
내가 병원의 접수/수납 창구 앞에서 뭔가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듯한 그 남직원을 보면서 떠올린 인물은 다름 아닌 정다은의 오랜 친구 송유찬(배우 장동윤)이었다.
송유찬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다. 완벽한 일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여기저기서 일감이 밀려들어 오는데 유찬은 동료와 상사의 그 어떤 부탁도 거절하지 못한다. 거기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회사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도 크게 작용한 탓이다. 밥을 먹는 중에도 화장실에 있는 중에도 퇴근 후에도 핸드폰에서는 끊임없이 업무를 부탁하고 독촉하는 톡이 올라온다. 그 과중한 업무에도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알기에 꾹꾹 눌러 참다가 결국 한계에 이르러 화장실에서 물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환각을 보고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이후 회사에만 가면 물이 차오르는 환각에 시달리게 되어 사표를 내게 된다. '공황장애'인 것이었다.
내가 그날 병원의 접수/수납 창구 앞 대기실에서, 어쩐지 업무에 미숙해 보이고 불친절하기까지 한 어린 남직원을 보면서 공황장애를 겪는 드라마 속 인물인 정유찬을 떠올린 것은 드라마를 본 여운이 가시지 않은 시기에 병원에 가게 된 우연이 만들어 준 일종의 경미한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 눈에는 남직원의 눈빛과 행동은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나의 이런 섣부른 걱정과 판단과 마음이 부디 쓸데없는 오지랖이기를... 부디 퇴근 후 동료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가볍게 쓸려 내려갈 감정이기를... 그래서 3개월 후 다시 창구에서 보게 되면 지금보다 친절하고 밝고 능숙한 모습이기를...
병원을 나서며 나는 아주 잠깐 그렇게 기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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