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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쾌한 제사가 있었답니다

머니앤파워 2024. 9. 1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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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뭉뚱그려 잘 보살펴 달라니 고민스러우시죠? 그럼 솔직히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게요...로...또... 1억... 아니면 5천이라도...”

 

(머니파워=황진교 ) 어린 시절의 깊고 깜깜한 밤. 한 숨 자고 일어나신 할아버지는 엄마가 세숫대야에 떠다 드린 물에 가볍게 얼굴을 씻으시고 도포를 꺼내 입으시고 머리엔 갓을 쓰시고 제사 지낼 준비를 하셨다.

학교에 낼 월사금도 겨우 겨우 내던 가난한 집에 제기와 젯상은 최상급이었다. 제삿날 저녁이면 두 오빠는 그 젯상과 제기들을 꺼내 윤 나게 닦았다. 병풍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아궁이에서 불씨를 담아와 향불을 준비했다. 특히 어린 내가 보기에 두 오빠가 아래채의 창고에서 꼬꾸라질 듯 낑낑대며 꺼내와 윤 나게 닦아 놓은 크고 높고 무거운 제상은 임금님이나 앉을 수 있는 왕좌처럼 위압적으로까지 보였다.

 12, 사랑방엔 수염마저도 정갈하게 매만지신 할아버지를 필두로 도시에서 내려온 친인척 몇 분과 집안의 남자들이 꽉 들어찼다. 제사 의식은 엄숙하게 진행되었으며 시간은 길었다. 험험... 할아버지의 거짓 기침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절을 하고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고 앉았다가 일제히 일어섰다. 맨 뒤에 서 있던 둘째 오빠는 서서 졸다가 비틀대고, 앉아서 졸다가 첫째오빠한테 작게 쥐어 박혔다. 나는 문 밖에 서서 잔심부름을 하며 어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맛있는 음복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길고 지루한 제사가 끝나고 할머니와 엄마와 언니와 내가 제사상을 허물고 음복상이 차리는 동안 아버지는 처마 끝에 서서 지방을 태우셨다. 아버지는 양손으로 옮겨가며 다 태운 한지재를 자정도 넘은 깊고 까만 밤의 허공으로 휘이이, 날려 보냈다. 그 재는 분명 땅으로 내려앉지 않고 그날 제사에 다녀가신 얼굴은 모르지만 어쩐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닮았을 것 같은 조상의 혼과 함께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어린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아직도 제사에 대한 기본 의식을 아주 무시하지는 못한다. 내 나름대로 최소한의 기본을 정해 두고 그것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 그 최소한의 기본이란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전과 나물을 직접 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특히 남자들은 그까이꺼, 라고 하겠지만 준비과정과 요리과정과 뒤처리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그까이꺼, 로 뭉뚱그려 대단치 않음을 폄하하기엔 몹시도 억울한 일임을 여자들은 알 것이다. 특히 제삿날이 평일이고 그날 출근을 해야 하는 여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몇 년 전의 내가 그랬다. 나는 출근을 해야 했고 그 해 제삿날은 평일이었다.

새벽 다섯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깨어났다. 하품을 물고 주방의 불을 켜고 앞치마를 질끈 동여맸다. 손을 씻기 전 귀에 이어폰을 끼고 그날 들을 음악이나 노래나 오디오북을 선택해 플레이를 눌렀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누구랑 협업하는 것 보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요리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큰 냄비에 고기가 삶아지고 작은 찜기에 조기가 쪄지는 동안 전기그릴에 미리 준비해 둔 꼬지(남편 작품)와 동태와 동그랑땡을 부쳐냈다. 조금씩 한다고 하는데 모두 한 접시에서 훨씬 넘는 분량들이었다. 무엇이든 넉넉하게 많이 하는 여자들에게 손이 크다, 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그에 해당하는 편이었다.

다 하고 나니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고기기름과 냄새를 잡기 위해 넣은 삶아 뭉그러진 야채들이 가득한 큰 냄비부터 생선을 쪄낸 찜기와 그릴을 닦아내거나 손을 닦은 뭉쳐진 키친타월들과 밀가루와 계란물이 뒤엉켜 들러붙은 쟁반과 계란물 풀었던 볼, 도마, 칼 등 조리 도구... 그리고 서랍에서 소환되어 임무를 마친 각종 조미료병들이 즐비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폐허 같았다. 나는 폐허을 재건해 나가듯 나는 마지막 임무인양 그것들을 하나 둘 치워나가기 시작했다.

가당찮게도(내 생각), 어울리지 않게도(친구들 만장일치), 맏며느리가 되었고, 제사를 지내게 됐을 때 제사를 준비하는 엄마 옆에서 엄마를 거들며 물어봤었다. 제사를, 꼭 지내야 되냐고...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새로운 문물과 새시대 사고방식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이는 편에 속하시는 엄마는 말씀하셨다.

좀 번거롭고 힘들어도 제사 때 정성을 들이면 조상이 자식 잘되게 보살펴 준다... 자식을 보살펴 준다는데 못할게 뭐 있냐...”

그렇다. 자식을 보살펴 준다는데 못할 게 뭐 있겠나...

그날 퇴근해서 급히 돌아오니 집의 현관문이 활짝 열려있고 탄내가 진동을 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연기도 자욱했다. 그 속에 남편이 당황하고 어이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주방에 가 보았더니 압력밥솥이 재기 불가능할 만큼 새카맣게 타 있었다.

출근하면서 휴무인 남편에게 오후 여섯 시 무렵 밥을 해 놓으라고 말해 놨다. 우리 집은 압력밥솥에 밥을 해 먹으며 남편도 평소 가끔 밥을 했다. 가끔은 물양과 시간을 잘 조절하여 나보다 더 맛있는 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번 할 때마다 엄청 많은 양의 밥을 해놓았다. 그래서 나는 밥솥에 적당량의 쌀을 미리 담아 두었고 남편에게 그렇게 일러 뒀다.

그런데 남편은 내가 쌀을 다 씻어 물까지 부어놓은 줄 알고 생쌀이 든 압력밥솥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그대로 불을 켠 것이다. 뒤늦게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압력밥솥이라 바로 뚜껑을 열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불을 켜기 전에 뚜껑 열어 확인도 안 해봤냐고 나무랐고 남편은 그냥 밥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나를 원망했다.

압력밥솥은 재사용이 불가능했고 손님을 많이 치를 때만 꺼내 쓰는 커다란 쿠쿠전기밥솥은 베란다 창고 깊숙이 들어있어서 꺼내오기 번거로웠다. 그렇다고 한 번도 안 해 본 냄비밥은 자신 없었다.

'햇반'을 생각해 낸 것은 나였다. 남편도 두 말 없이 찬성하고 집 앞 슈퍼에 뛰어갔다 왔다.

그 해 제사상엔 그래서 '햇반'을 올렸다.

한바탕 소란스러웠지만 제사는 무사히 시작되었다. 때는 코로나시국이었다. 지방에 사는 남편의 형제 그 누구도 참석할 수 없었다. 간소한 제사상 앞에서 남편과 아들, 달랑 둘만이 있었다. 적적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 슬금슬금 남편과 아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같이 절을 했다. 적적함과 쓸쓸함을 조금이라도 지우고 싶어 입을 열어 말을 해 보았다.

"아버님 어머님 햇반 처음 드셔 보시죠? 집에서 한 밥이 아니라 사서 데운 밥이랍니다. 요즘은 집에서 밥을 안하고 사서들 많이 먹어요...특히 젊은이들의 주식이지요... 맛이 어때요? 괜찮죠? 드시고 올라가셔서 자랑하셔요... 햇반이란 거 먹어봤냐? 우리는 먹어봤다... 맛있더라... 우리 자식 놈들 은근 신식이다... 세상 좋아졌더라...라고요..."

나의 너스레에 남편과 아들 둘 다 입을 씰룩이며 웃음을 참았다. 쌀을 태운 덕(?)에 그 해 우리들의 제사는 뜻밖에도 유쾌하게 마무리됐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우리의 제사가 엄숙함과 무거움을 벗고 유쾌하고 가벼워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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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사도 있었다.

남편이 짐짓 엄숙하게 절을 하는데 수북이 담은 쌀밥 위에 꽂은 숟가락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어... 하는 동시에, 남편이 잡으려 손을 뻗는 사이에 숟가락이 쌀밥을 완전히 이탈하여 상 밑으로 투두둑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이구... 참말로... 그거 하나 제대로 못 꽂아서...좀 야무지게 꽂지...“

새 숟가락을 가져다주면서 나는 계속 말을 멈추지 않았다.

"죄송해요 아버님 어머님.... 이이가 좀 엉성하잖아요.... 모든 면에서...야무지지 못하고...“

옆에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하던 아들이 픽 하고 웃었다. 나는 아들의 모습을 일별하고는

"어떡해요 아버님 어머님... 손자도 엉성해요... 어릴 때의 어느 한 여름 조카들끼리 물놀이를 하다 말고 둘째오빠 딸이 아들에게 야무지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ㅇ이오빤 왜 그렇게 엉성해? 돌아보니 아들이 물 속에 엉덩방아를 찢고 넘어져 있는 거예요...검은 뿔태 안경은 코에 걸려 있고...”

둘 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의 수다를 제지하지 않았다.

잠깐 뜸을 들인 후 나는 드디어 고인까지도 소환해 버렸다.

어머님... 혹시... 아버님도 엉성... 하셨나요? 엉성... 하셨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백했다.

"아시겠지만... 사실은 저도 엉성해요... 우리 엉성한 세 식구.... 이 험한 세상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잘 보살펴 주세요...”

이 말은 너무도 진심이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개를 살짝 돌려 고개 숙인 남편의 옆 얼굴을 살펴보았다. 엄숙함을 가장하고 있던 얼굴이 풀어진 듯 온화해 보였다. 이때쯤 일어나서 절을 해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남편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어쩐지 하고 싶은 말 더 해 보라는 뜻인 듯 해서 나는 또 생각나는 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님 어머님 너무 뭉뚱그려 잘 보살펴 달라니까 고민스러우시죠? 뭘 어떻게 보살펴 줘야 하나... 그럼 그냥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부탁할게요...“

나는 짐짓 잠깐 뜸을 들였다. 그리곤 작지만 또렷하게 천천히 말했다.

"... ..."

아들이 먼저 킥, 하고 웃었다. 나는 얼른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남편은 애써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나는 남편도 아들도 가끔 로또를 사는 걸 알고 있었다. 반응이 괜찮았다. 더욱 신이 난 나는 다음 말을 계속했다.

"1... ... 안될까요? "

, 하고 드디어 남편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의 웃음소리에 아들도 좀 더 소리 내 웃었다. 나는 더욱 기가 살아서는...

"1억이 힘드시면... 5천이라도..."

남편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약간 돌린 채로 아들은 꿇어앉아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그 상태로 조금도 크게 킥킥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는 더더욱 기가 살아서는 시부모님께 진짜 고자질하듯이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저이 좀 보세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인데 체면상 못하다가 내가 대신하니까 좋아하는 거..... "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이번엔 좀 더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대뜸, 유머라고는 약으로 쓸래도 없는 남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술이라도 한잔씩 올리면서 말씀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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