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내 생일 잊어먹고 그냥 지나갔지? 그거랑 이거랑 퉁 쳐!
뭐? 니 생일선물이랑 차 수리비를 퉁치자고?
결국 ‘돈’ 이었나... 나는 ‘마음’을 퉁치자는 거였는데...
(머니파워=황진교) 단풍구경 가자고? 내가 자랑했던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닌다는 캠핑용 테이블세트랑 커피랑 뜨거운 물이랑 김밥이랑 샌드위치랑 사발면 준비해서? 노란 은행잎이 카펫처럼 깔려 있는 은행나무 아래 앉아 벌써 떠나려고 하는 깊고 그윽하고 쓸쓸한 가을을 만끽하자고?
나 안돼... 또 차를 망가뜨렸지 뭐야...
아니... 다른 차랑 부딪친 건 아니고 나혼자... 이번에도 나 혼자... 주차연습 하다가...
남편 또 엄청 화내지 뭐... 도대체 몇 번째냐고... 말로라도 안 다쳤으면 됐다고 해주면 안 되나... 어쩜 그렇게 정 떨어지게 화를 낼까... 매 번... 다른 남편들 얘기 들어보니까 우리 남편처럼 이 정도로 화내지는 않는다던데...
경이 얘기 너도 들었잖아. 막 운전에 입문한 시기에 불법 유턴하다가 사고를 내서 견적도 오백이 넘게 나왔는데도 걔 남편이 자기가 가끔 불법 유턴하는 걸 보여줘서라고 자기 잘못이라고 오히려 미안해했다잖아. 역시 애처가는 다르다니까.
차량 외부 파손이어서 주행에는 지장이 없지만 기분이 그래서 운전하기 싫어... 당분간 그럴 것 같아.... 아니 아예 하지 말까 봐...
어쩌다가 그랬냐고?
참...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고 내 행동도 이해가 안 가... 후진주차도 겨우 하면서 전면주차 하려고 하다가... 왜 그랬나 몰라 진짜... 왜 그랬나 몰라... 정말 그 순간에 심술궂은 다른 혼이 잠깐 들어왔던 건지.... 도저히 내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진짜....
지난 일요일이었거든... 남편이 점심모임에 늦어서 전철역까지 태워다 줬어. 우리 남편 정말 웃겨. 내가 있는데도 잠자는 애를 깨우는 거야 전철역까지 태워다 달라고. 내 운전이 그렇게나 못 미덥다는 거지. 그래도 면허증 딴 지 일 년이 넘었는데. 그래서 내가 태워다 준다고 했지. 고작 10분 정도 거리도 못 미더워서 갈 때는 자기가 운전하더라. 전철역에 내려서 나 운전석에 앉는 거 보고도 의자 조절해라 사이드미러 조절해라 천천히 가라 안절부절못하다가 갔다 글쎄...
집까지 되돌아오는 길이 좀 복잡하기는 해. 4차선이어서 차선변경도 많이 해야 하고 유턴도 해야 하고... 아직도 많이 긴장되는 코스이기는 하지...
무사히 집 앞에 오고 나니까 욕심이 생기는 거야. 이왕 운전대 잡았으니까 좀 더 돌아다녀보자... 운전 잘하는 방법은 무조건 많이 해보는 거라니까... 운전 안 한 지 일주일도 넘은 것 같고... 자주 해 줘야 두려움도 긴장감도 없어지고... 운전 베테랑 친구 말마따나 운전은 그냥 '신발 신고 집 나서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져야 된다니까... 뭐니 뭐니 해도 자주 해보는 게 상책이니까....
그래도 새가슴이어서 멀리는 못 가고 집에서 전철역으로 전철역에서 집으로 코스를 다르게 해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지. 하다 보니 또 더 욕심이 나는 거야... 더 멀리 나가 봐?
그래서 또 30분 거리에 있는 한창 운전연습할 때 자주 가던 유원지까지 가 보기로 했지. 일요일 오후라 유원지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붐비더라. 출발할 때는 강기슭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커피라도 한 잔 해야지 했는데 차가 너무 많아서 주차할 자신이 없어졌지. 아쉬워 하면서 그냥 바로 집으로 왔어.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켰지. 후진주차로. 아직도 한 번에 주차는 안되고 몇 번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서 겨우 했지. 특별히 집에 가서 할 일도 없고 주차장이 빈자리도 많길래 연습 삼아 후진주차도 몇 번 했어. 차와 차 사이도 해보고 차와 기둥 사이도 해보고 오른쪽도 해보고 왼쪽도 해보고....
거기서 끝내야 하는데 난데없이 전면주차를 해볼까 싶은 거야. 유튜브 숏폼을 막 올려보다 보면 가끔 주차영상도 나오거든. 요즘 자꾸 전면주차가 눈에 들어와서 눈여겨봤어. 노상주차를 해야 할 상황을 대비해서 말이야. 영상으로는 쉬워 보이잖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다른 차와 접촉하는 건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한쪽은 기둥이 있고 한쪽에 경차가 있는 곳을 선택했어. 그 경차도 전면주차를 해 놓았더라고. 유튜브 숏폼 영상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신중하게 천천히 핸들을 돌려 자동차 머리를 넣었어.
그런데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경고음이 울리면서 차가 움직이지가 않는 거야. 기둥과 경차 사이에 대각선으로 끼어 버린 거지. 앞으로 조금만 더 움직이면 경차에 닿을 것 같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려서 바퀴 방향도 보고 생각을 정리해서 천천히 살살 빼면 괜찮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거야. 경고음은 점점 크게 앵앵거리고 차는 꼼짝도 안 하니까 일단 후진을 하면 차가 빠져 나갈 것 같아서 후진으로 돌려 놓고 액셀을 그냥 밟아버린 거지.
그때 경고음보다 더 공포스러운 소리가 바로 들려왔지...
우지지직....
엄청나게 크고 잘 마른 나무가 천천히 쓰러지다가 어느 순간 속도가 붙어서 급속도로 쓰러질 때 나는 소리 같은...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지진이 나서 지하주차장 건물 한 면이 무너지는 것 같이 들렸어...
너도 알다시피 나 운전에 대해서 아니 기계 앞에서는 완전 겁쟁이잖아. 그런 쫄보 겁쟁이가 그땐 왜 그렇게 과감했을까. 왜 후진을 그렇게 급하게 했을까... 신중하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좀 기다렸다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볼 생각을 못했을까... 버스 기사의 도움까지 받았던 내가... 내가 얘기했었지? 버스 앞에서 후진을 못해서 버스기사에게 도움을 청해서 그 기사님이 내려서 도와 준 일...
그랬던 내가... 내가 한 행동이 분명한데도 내가 한 행동이 아닌 것 같아. 틀림없이 그 순간엔 다른 혼의 지배를 받은거야... 틀림없이... 어느 심술궂고도 사악한 나쁜 혼이 말이야...
제발 조금만 표시 나기를 염원하면서 차 문을 열었지. 그런데 차 문이 열리지가 않는 거야. 조금 힘을 줘서 열었더니.... 맙소사....
우지지직!!!
또다시 마른 나무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 거야...겨우 나와서 차를 살펴 보았더니...왼쪽 사이드미러 앞 범퍼도 찌그러지고 문짝도 찌그러지고...
사실 아직 수리하지 않은, 내가 몇 번 스크래치 낸 것도 그대로 있으니까... 좀 우그러지거나 스크레치가 났으면 그냥 말 안 하고 넘어가려고 했거든. 그 와중에도 그런 꼼수가 생각나더라구... 나중에 발견하고 이거 뭐냐고 그러면 어? 언제 그랬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하면서 능청스럽게 넘어가 볼까도 생각했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야.... 특히 문짝 때문에...특히나 운전석 쪽 문... 열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열리지가 않아. 힘을 좀 줘서 열면 열리거든... 그런데 조금 열리다가 말고 어딘가에 걸려서 열리지가 않아. 조금 힘을 줘도 열리지가 않아. 좀 더 세게 힘을 줘서 열며 우지지직!!! 소리를 내면서 열려... 이건 어떻게 해도 속일 수 없잖아....
수리비도 수리비지만 남편 화낼 거 생각하니까 진짜 짐 싸서 집 나가고 싶더라니까...
니들은 우리 남편 순하고 착한 인상이라고 그러지? 화났을 때 모습을 안 봐서 그래... 완전 다른 얼굴이야. 얼마나 차갑고 딱딱한지... 온기나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전 냉혈한의 얼굴이야... 그런 얼굴을 또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온몸이 오그라 드는 거 있지?
자포자기 상태로 집에 들어와서도 믿을 수가 없는 거야 내 행동을...
오죽하면 좀 쉬었다가 다시 주차장에 가 봤다니까. 찌그러진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문 열 때 나는 그 나무 밑동 부러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만 안 나기를 바라면서....문만 정상대로 열려주면 얼마 간이라도 넘어가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싶어서... 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봤지...
그럴 수도 있잖아. 상처처럼....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상처처럼... 부러진 뼈도 시간이 지나면 붙는 것처럼... 잠깐 휙 돌아갔던 부분이 그 사이에 다시 돌아왔을 수도...그런 기대를.... 그런 말도 안되는 ... 그 나무 밑동 쓰러지는 소리가 오작동이었기를... 거짓말처럼 사라져 주기를... 두 번....세 번...
나 바보 같지?
어... 그 정도야... 우리 남편 유난히 자동차에 예민하게 굴어... 나 운전하기 전에는 몰랐지...
행여 내가 다칠까 봐 귀해해서 그렇다고?
그건 절대 아닌 것 같고... 만약 그렇다면... 내가 그걸 못 느낄까...
그냥... 남자들 중엔 유난히 자기 차에 민감한 부류가 있다니까... 남편도 그런 부류거니... 애써 이해해 주는거지...
아 내가 얘기 안 했지? 이번 내 생일 말이야.... 우리 남편 모르고 그냥 지나갔어. 나도 말 안 했고... 우리 남편 무슨 기념일 같은거에 무심하잖어... 거의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거 같은 생일축하 이번에는 왠지 하고 싶지가 않더라고... 혼자 그냥 도서관에서 보냈지 뭐... 별로 슬프지 않았어. 좀 쓸쓸했지 뭐... 나이가 몇인데 그만한 일로...
그때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요즘 말로 킵, 해 뒀다가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 꺼내놓고 퉁 치지고 해야지... 내가 생각해 놓고도 아주 기발한 생각 같더라구... 그 생각으로 그날의 쓸쓸함이 다소 만회되었지 아마...
하하... 이렇게 퉁 칠 일이 빨리 생길지 누가 알았겠어...
그날 남편에게 이실직고 한 후에, 주차장에 내려가서 차를 확인하면서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얼굴을 외면하고 내가 말했지.
나 생일 지난 거 알아? 몰랐지?
아주 잠시 어리둥절해 하는 듯 하더니 바로 차갑게 돌아와서는 소리를 꽥 지르는거야...
그 얘기가 자금 왜 나와?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내 생일 그냥 지나간 거랑 이번에 차 망가뜨린 거랑 퉁 쳐....
뭐????
다시 한번 어아니벙벙한 듯하더니 또다시 냉혈한의 얼굴이 되어서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라...
생일선물이랑 차 수리비를 퉁치지고?
뭐????
이번에는 내가 어리둥절해졌지...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이고 대답이었거든... 뭔가 내 뒤통수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것 같더라...순간적으로 놀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어...
아.... 결국 <돈>이었나? 남편은 결국 <돈>을 생각했구나... 그런데 나는 왜 <돈> 생각을 안 했을까....
나는 그 <마음>을 생각했는데... <마음>을 퉁치자는 말이었거든.... 내가 차를 망가뜨린 미안함과 남편이 내 생일을 모르고 지나간 그 서로에 대한 미안한 <마음> 말이야.... 나는 그 < 마음>을 퉁치자는 뜻이었는데....
그래.... 참 다르지? 정말 다르지? 오래전에 잠깐 유행했던 화성남자 금성여자인지 금성남자 화성여자인지도 떠오르고...
정말 달라... 다름을 인정하는 게 원만한 인간관계의 핵심이라지? 당연히 부부도 예외는 아니고 말이야....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아직 인정해야 할 ‘다름’ 이 남아 있다니...
당연히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그렇게 살게 되겠지만... 아직은... 좀 그래...
그래.... 조만간 보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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